아이돌 목소리
지금의 아이돌은 팝송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때 어떤 식의 음악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예이다. 국내에 네오 소울 장르를 소화할 아이돌이 있다면 누굴까? 지금 가장 팝적인 목소리를 가진 아이돌은? 5명의 팝 칼럼니스트는 다음과 같은 5명의 아이돌 목소리를 주목한다.
빅뱅의 태양
현재 아이돌 가수들 가운데 가장 음악적 미래가 밝은 가수로 태양을 꼽는 것은 과한 일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태양은 [HOT] 이라는 EP를 통해 실제로 자신의 '밝은 미래'를 증명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큰 기대를 하는 이유는 자신이 뭘 하고 싶어하고, 뭘 가장 잘할 수 있는지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이는(아이돌 가수로 한정할 때)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나만바라봐'와 '기도'에서 들려준 그의 노래는 자신의 미래를 아는 자만이 들려줄 수 있는 수준의 가창이었다. 그의 보컬은 블랙 뮤직을 꿈꾸되 무조건인 흉내 내기로 그치지 않는다. R&B나 소울 하면 떠오르는 과도한 바이브레이션과 기교를 자제하고 자신의 목소리와 감정을 과하지 않게 드러내며 거기에 살짝 흑인 음악의 색깔을 입혔다. 그는 결코 '열창'하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세미 R&B보컬'이라고 해도 될 만하다. 이는 세계(혹은 미국)적인 추세이지만 국내에선 태양이 거의 유일하다. 대신 음악은 확고한 흑인음악의 비트로 만들었다. 이런 점 때문에 태양의 보컬이 다소 평이하고 비트에 묻힌다고들 비판하지만 난 오히려 반대로 이 점이 태양만의 개성이 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범위를 세계로 넓힐 때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보컬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트렌드만을 쫒아가는 모양새가 돼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후발주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의 노력에 시간이 더해진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김학선 (웹진 [보다]편집장)
소녀시대의 제시카
근래 걸 그룹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천편일률적이어서 금세 싫증이 난다. 소몰이 창법을 무기 삼은 한두 R&B 메인 보컬과 듣는 사람 생각 안 하는 노래방 창법의 서브 보컬,그도 안 되면 랩을 시키고 이마저 포기해야 할 때는 오토튠으로 뒤짚는다. 그러나 소녀시대의 제시카는 다르다. 예쁜 발음으로 고음을 곱게 노래할 때 문듯 대중음악이 가장 멋지던 시대의 팝에서 듣던 목소리와 유사한 쾌감을 느꼈다. 이런 계열의 목소리는 언제나 시대의 사랑을 받았다. 1960년대 남유럽의 시크한 샹송 인형들로부터 스윙잉 런던의 뮤즈들뿐 아니라 80년대에 근사함 비트와 사근사근한 멜로디로 대중적 지지를 얻던 버지니아 애스들리라든가 7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유명 작곡가들이 대거 메인 스트림으로진출한 80년대 일본의 아이돌 중 오카다 유키코와 이이지마 마리 등에서 이런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시카가 노래하는 목소리는 구미의 엔지니어들이 얘기하는 'Shine'. 그러니까 쌩한 느낌이 아닌 예쁘고 품위 있게 빛나는 느낌을 담고 있다. 이 목소리는 서구적인 음 제작에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근자의 걸 그룹들이 내는 목소리는 때로 너무 근본 없이 성급하게 목청만 휘두르는 느낌이 든다. 설익은 풋내가 진동을 하다못해 천박하다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제시카의 목소리는 여유로운 데다가 품격까지 있다. 이 목소리는 고급스럽게 색이 바랜 실크같다.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한 번쯤 있었음직한 화려한 시간을 되살린다. 여기에 제법 많은 이가 사랑하던 팝의 느낌이 존재하고 있다.
박주혁(칼럼니스트,반디에리 뮤직 대표)
샤이니의 종현
종현의 가창력을 얘기할 때 팬들은 늘 스페인의 알레한드로 산스가 부른 'Y Si Fuera Ela'를 편곡한 '혜야'를 거론한다. 이 곡에서 종현의 보컬은 한국어를 하는 홀리오이글레시아스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그만큼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엇박에도 안정적으로 흐른다는 얘기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종현의 보컬을 좋아하는 이유는 안정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보컬은 말 그대로 다이내믹하다. '링딩동'에서 그 목소리는 허스키한 듯 깔리다가도 도약할 때는 맑게 울리는데 콤파운드처럼 구석구석을 채운 오토튠 덕분에 그 낯선 느낌이 배가된다. 샤이니 노래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라 생각하는 'JOJO'에서도 그는 80년대를 풍미한 런던 보이스의 '롤라장 신스팝'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주류 가요 중에도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영미권 팝의 최신 트랜드를 반영하거나 재해석하는 각축장이 된 지금, 남자 아이돌 보컬의 대부분이 미국 주류 팝 스타일을 추종하는 게 사실이지만, 종현의 보컬은 때때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취향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의 보컬이 현재 가장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그의 목소리를 주목한다.
차우진(팝 칼럼니스트)
2NE1의 박봄
감탄은 하되 좋아하긴 어려운 목소리와 감탄보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 중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을 고르겠는가? 후자를 고르실 분들이라면 박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된 것이다. 2NE1에서 '가창력'을 담당하고 있는 박봄의 보컬은 동년배 아이돌 보컬 중에도 단연 개성적인 색깔을 갖고 있다. 굳이 덧붙이면 잘 '훈련'된 보컬이라기보다는 '날것'인 느낌이 강한 목소리라고 해야 하나. 프로듀서 테디가 박봄의 목소리를 가리켜 '어디에도 이런 음색은 없다'고 자랑 반 감탄 반 분위기로 말한 것이 기억이 난다. 그걸 소속사 아이돌에 대한 립서비스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녀의 롤 모델이 셀린 디온풍의 '백인적' 디바보다는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 등의 '흑인적' 디바라는 건 잘 알려져 있는바. 요점은 성량도 성량이지만 '표현력'이나 '호소력'이 강하다는 거다. 이는 잘 훈련된 기교적인 보컬에서는 찾기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박봄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배경으로 하는 세련된 느낌의 어반 R&B에서 가장 빛난다. 아델이나 더피 같은 '뉴 브리티시 네오 소울' 성향의 곡들, 빈티지한 전자음 속에서 인간적인 음성을 내는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 말이다. 솔로 히트곡 'You And I'를 듣다 보면 카카오 함유량 72%짜리 초콜릿을 귀로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도 그리 허언은 아닐 것이다. 다만 종종 발음과 창법에서 '우물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나는데, 그 거품만 걷어낼 수 있으면 진한 에스프레소 같은 '네오 소울 아티스트'가 되는 것도 희망 사항은 아닐 것이다.
최민우 (웹진 [Weiv]편집장)
2PM의 준수
서커스를 연상시킬 만큼 강렬한 퍼포먼스에 비해 대표되는 목소리는 희미하다는 게 2PM에 대한 중론이다. 그래도 음절 끝에 여운을 남기는 김준수의 음색이 있기에 이들의 음악은 이어폰으로도 들을 만했다. 화려한 다른 멤버에 비하면 그의 이미지는 상당히 절제된 편이다. 그러나 노래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김준수의 노래가 신물 나는 보코더와 애크러배틱 댄스 없이도 근사하다는 건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캘빈 리처드슨의 'Half the Time'커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울풀한 목소리는 이 한 곡의 노래에서만큼은 완성에 가까운데,아이돌 그룹의 보컬에게 일반적으로 종용되는 병풍 같은 역할에 그를 한정하기엔 신경질이 날 정도다. 물론 음역대의 폭이 넓지 않아 종종 불안함을 노출하기도 하지만 그의 음색이 뒤돌아보게 하는 애잔함을 갖고 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아주 짧은 훅에서도 묻어나는 잔향들은 일률적인 트레이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타고난 미성 위에 수많은 음악을 곱씹으며 자신의 것으로 구체화했을 비음이 더해져 비로소 올드스쿨의 절절함에서 뉴 스쿨의 깔끔한 맛까지 두루 소화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N분의 1로 나누어져 있는 2PM의 노래에서 그의 매력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게 청자로선 아쉬울 따름. 참,그는 꽤 깊은 수준의 흑인 음악 마니아로도 알려졌는데,가끔 전형적인 한국식 발라드를 부를 때 굉장한 자신감과 만족스러움이 전해지는걸 본인도 알고 있을까? 더불어 소속사인 JYP가 그런걸 은근히 잘하다는 사실도.
송지혜(팝 칼럼니스트)
1차출처: 나일론 2월호
2차출처: 베스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