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혜 기자] 한류 문화가 드라마에서 음악으로 넘어가며 K-POP의 인기가 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확산되고 있다. 국내 아이돌 그룹의 일거수일투족에 세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 그들이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은 SNS와 유투브를 통해 글로벌 팬들에 의해 각 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퍼지고 있다.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국내 아이돌과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많아지고 있는 것 또한 K-POP의 변화된 위상을 느낄 수 있는 현상이다.

팝계의 거물 퀸시 존스는 2011년 방한 당시 “여러 나라의 아티스트들을 접했지만 K-pop 아티스트들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며 “한국 가수들이 서구시장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2011년 5월 1일 문화와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300여명의 현지인들이 모여 플래시몹 형태의 시위를 벌였다. 이틀 후인 3일,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도 4000여명이 모였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과 현수막에는 똑같은 요구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SM타운 공연을 보고싶다”

 

 

파리에서 열릴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패밀리 콘서트인 ‘SM타운’의 공연 표를 구하지 못한 프랑스 K-POP팬들이 공연 연장을 요구하며 모였고 이는 곧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연달아 페루와 미국 등지에서도 공연 개최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사상 유래가 없던 일이었다.

그들은 SM 소속 가수들의 노래와 춤을 추며 시위를 축제로 만들었다. 또한 자신들이 얼마나 공연을 원하는지를 취재진들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단 하루로 예정되어 있던  SM타운 파리 공연은 이틀로 연장되었다.

이렇듯 SM엔터테인먼트는 명실상부 K-POP의 선두주자로서 세계 속의 한류를 이끌어가고 있다. SM이 걸어온 발자취를 통해 그들의 스토리를 들어보자.

제국을 향한 첫 발을 내딛다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 TV음악채널이 개국하는 것을 본 당시 이수만 대표는 음악 역시 비주얼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파악했다. 귀국 후 1995년 SM을 설립, 이듬해 1세대 아이돌 ‘HOT’를 데뷔시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5년 설립된 SM은 1996년 1세대 아이돌 ‘HOT’를 데뷔시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SES’, ‘신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등을 연이어 데뷔시키며 국내 가요계의 지분을 점차 넓혀갔다. 그들의 성공이 이어지며 SM은 특유의 ‘발굴-육성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국내에서 성공을 거둔 SM은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SES가 첫 타자로 야심차게 일본진출을 선언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사실상 실패였다. 하지만 이수만 대표는 해외시장에 대한 꿈을 포기 하지 않았다. 국내시장은 한계가 있었고 SM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서 해외진출은 꼭 필요한 비전이었기 때문.

SM은 SES의 실패를 교훈으로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세계 진출을 위한 콘텐츠를 길러내기로 결심, SM 조직과 인재 양성 시스템을 전문화 했다. 그리하여 2000년,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진출을 위한 트레이닝을 받은 ‘보아’를 데뷔시킨다. 또한 철저한 현지화를 위해 2001년 일본 거대 에이전시 에이벡스와 계약을 맺는다.

 

철저한 현지화로 보아의 모든 음반작업은 일본에서 진행되었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보아는 일본인 신인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2001년 3월 단독 쇼케이스를 열고 일본에 진출, 현재까지 일본 최고의 공신력을 가진 오리콘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일곱 차례나 기록했다. 또한 2005년 발매한 베스트 앨범은 일본 여성가수 중 첫 번째 밀리언셀러로 기록되는 쾌거를 일궈냈다.

또한 보아는 일본의 국민적 행사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연말 프로그램인 NHK 홍백가합전에  2002년부터 2007년까지 6년 연속으로 출전하는 등 일본 내에서의 입지를 충분히 다진 가수였다.

보아라는 아이콘은 단순히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 가수라기보다 국내 아이돌들의 일본 진출의 길을 열어 준 개척자라는 점에서 더 의의가 깊다. 보아는 2011년 도쿄 돔에서 열린 SM 라이브 공연에서 일본 데뷔 10주년을 맞아 K-Pop 선두주자로서의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보아는 “10년 전에는 한류도 없었다, 우리나라 가수가 일본 무대에 서는 일은 정말 드물었다”며  “익숙하지 않은 것의 연속이었고 많이 외로웠다”고 털어놨다. “지금 일본 시장에 진출하는 친구들보다는 여러모로 불리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일본으로 진출하는 후배 가수들에게 부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보아의 성공적인 일본 데뷔 이후 국내시장에서의 SM은 암흑기를 걷고 있었다. 1세대 아이돌들의 은퇴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야심차게 내놓은 아이돌 그룹들의 잇따른 부진이 이어졌기 때문. 이렇게 쇠퇴의 길을 걷나 싶을 때 2004년 SM은 새로운 구세주 ‘동방신기’를 데뷔시킨다.

 

동방신기는 새로운 아이돌 전성시대를 열며 HOT를 이은 SM팬덤의 중심이 되어 활약하기 시작했다. 동방신기의 성공에 탄력을 받은 SM은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차세대 대형 아이돌들을 탄생시켰다. 이미 보아를 통해 일본시장에서의 가능성을 맛본 SM은 국내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그들을 차례로 해외시장에 진출시켰다.

해외시장 공략 본격화


동방신기를 필두로 일본시장에 진출한 SM 소속 가수들은 부단한 노력 끝에 일본 시장에 안착하게 된다.

 

김영민 SM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스타를 빛나게 하는 SMP(SM Performance music)가 대중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라며 일본 시장 진출 성공의 비결을 털어 놓기도 했다.

“SM이 표방하는 음악은 퍼포먼스가 결합됐을 때 아티스트가 돋보일 수 있어야 한다. 무대나 영상을 보고 가장 먼저 가수가 뇌리에 남아야 한다. 곡이 먼저 떠오른다면 큰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며 “절대로 가수보다 곡이 두드러지면 안 된다. 이런 부분은 퍼포먼스에서 출발한다. SMP 장르가 일본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영역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일본 시장 내에 입지를 다진 SM은 중국 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SM 소속으로 처음 중국에 진출한 것은 HOT다. 뒤를 이어 슈퍼주니어가 유닛 슈퍼주니어-M으로 중국 시장에 진출, 중국어로 부른 2집 ‘브레이크 다운’이 미국 빌보드 월드 앨범 차트 정상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2012년 3월 31일과 4월 1일 SM은 서울과 베이징에서 각각 대규모 쇼케이스를 열었다. 6인조 한·중 쌍둥이 신인그룹 엑소-K와 엑소-M의 양국 동시 데뷔였다.

 

K와 M은 한국(Korea)과 중화권을 뜻하는 만다린(Mandarin)의 앞 글자를 땄다. 한국에서는 SM이 최초로 시도하는 방식으로 두 그룹은 동일한 콘셉트와 노래, 안무로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활동했다. 세계의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 시장을 겨냥한 전략이었다.

 

당시 이수만 대표는 SM이 지금의 K-pop 열풍에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로 “세계 각국의 작곡가, 안무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10여 년 전부터 착실하게 준비해 온 것이 지금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SM가족 모두가 부단한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다”고 한 언론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또한 “서구와 차별화된 인재양성 시스템이 SM의 장점이자 경쟁력”이라며 “한류의 성공에는 현지기업과의 협업이 절대 필요조건이다. 조직과 체계적인 교육, 인재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국격을 갖춘 글로벌 콘텐츠 기업으로

2012년 8월 18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3’ 서울 공연에 앞서 SM 소속 가수들은 전 세계가 음악으로 하나가 된다는 가상 국가 ‘뮤직네이션 SM타운’을 선포했다. 선포식에는 30여 개국에서 온 팬들이 참석하기도 했다.

 

 

출발은 SM 소속 가수들이 모두 참여해 1999년 발매한 크리스마스 기념 음반 ‘크리스마스 인 SM타운’이었다. 이후 SM은 ‘SM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소속 가수들의 합동 음반발매와 콘서트를 이어나갔다. K–POP의 위상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자 ‘SM타운 콘서트’는 2008년부터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라는 이름으로 해외 공연으로 변모했다.

전 세계적인 K-POP 열풍으로 SM의 팬덤 역시 세계로 뻗어나갔다. 2011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SM타운 공연 시위’는 K-POP을 향한 전 세계의 사랑을 입증, 이미 진출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했다.

이에 SM은 팬덤의 끈끈한 결속을 위해 ‘가상 국가’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국기에 이어 여권까지 만들어냈다. 팬들의 충성도는 강한 구매력과 비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만 프로듀서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 “오프라인 시장은 중국이 가장 크고, 가상 국가로서 ‘SM타운’이 존재할 것이다”며 “한국은 5000만명이 아닌 수십억명의 인구를 가진 거대한 나라일 수 있다. 우리 문화를 해외에 나가서 보여주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해외로 진출하는 것이 아닌, 얼마나 좋은 콘텐츠를 만드느냐가 더욱 중요해졌다. 문화와 IT산업이 결합해 폭발적인 국가 브랜드가 탄생하고 있다”며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불공정 게임의 운영자
  
2009년 7월 31일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던 동방신기의 멤버 김재중, 박유천, 김준수는 소속사 SM을 상대로 법원에 “부당한 전속계약의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며 가처분 신청 소송을 제기했다. 뜨거운 논란 이후 2010년 8월 유노윤호와 최강창민이 두 명이 동방신기라는 이름을 걸고 무대에 오르자 JYJ라는 그룹을 결성해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소송은 3년 4개월간 이어졌고 JYJ의 방송활동은 순탄치 못했다. JYJ의 팬덤과 상대적 약자에 대한 동정표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나 싶었지만 가요프로그램에 단 한 차례도 출연하지 못했다. 또한 제주 홍보대사임에도 불구 제주에서 진행된 KBS ‘세계자연경관 7대 유산 기원 제주음악회’의 출연을 불과 4일전에 일방적인 취소 통보를 받았고 그들의 공석은 소녀시대와 f(x)가 채웠다.

이는 HOT의 지난 행보와도 닮아있었다. HOT 해체 후 장우혁, 토니안, 이재원 역시 JTL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했지만 그들 역시 순탄치 않은 행보를 걸었다.

모종의 방해가 의심되는 가운데 JYJ는 음반과 관련한 방송과 예능에는 일체 얼굴을 내비치지 못한 채 드라마를 통해 간간히 활동을 이어나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JYJ 활동방해에 대해 SM을 상대로 6개월 가량의 조사를 벌였고 SM이 추후 JYJ의 활동을 방해할 경우 위반 행위 회당 2000만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간접 강제명령을 내렸다.

2012년 11월 28일 SM과 JYJ는 양측 간에 체결된 모든 계약을 가처분 신청 일자인 2009년 7월 31일 자로 종료하기로 합의 했다. 모든 소송을 취하하고 이후의 상호 제반 활동을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체결했다.

 

하지만 법정다툼이 마무리 되고도 JYJ 활동에 적신호가 켜졌다.

2013년 7월 15일 발매된 멤버 준수의 2집 정규 앨범의 유통과 마케팅을 맡은 메이저급 유통사에서 앨범 발매 6일전 돌연 홍보 및 마케팅을 전면 백지화 하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비록 하루 만에 원만한 합의를 거처 예정대로 홍보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SM을 떠난 연예인들의 연예 활동은 아직도 불안하다.

방송사의 한 관계자는 “인기 있는 아이돌이 소속되어있는 대형 기획사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며 은근한 압력이 행사되고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SM은 지난 2002년 이후 불공정 거래 계약으로 인해 수차례의 파문을 일으켰다.

2002년 공정위로부터 HOT의 멤버 문희준, 토니안과의 계약이 연예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설정되어있다며 시정명령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4년 시정명령 취소청구소송에서 패소, 잇따른 전속계약효력부존재 확인 소송에 패소했다.

SM 소속 연예인들의 소송이 계속되자 SM의 전속계약 조건이 알려지게 됐고 일명 ‘노예 계약’ 논란이 일었다. 사회적 파장이 커지면서 공정위의 조사가 진행되자 SM은 자진해서 계약 조건을 수정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연습생들과의 계약을 일률적으로 3년 연장해 공정위의 제제를 받기도 했다.

이후 소속 가수들이 소속사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으나 이유 없는 SM탈퇴 가수들의 부진이 이어지면서 노예계약과 탈퇴가수의 활동 방해라는 꼬리표를 아직도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시장 독식인가 신생 한류를 위한 성장 동력인가

SM의 계열사 SM C&C는 공격적인 스타영입을 통해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

 

2012년 8월 중순 잠정 은퇴상태의 강호동을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신동엽, 김병만, 이수근과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배우 장동건, 김하늘 한지민 등의 톱스타 들이 소속된 AM엔터테인먼트를 흡수 합병했다. 최근에는 배우 김수로와 전속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 같은 톱스타들의 대거이동은 그들과 SM과의 비전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톱스타들은 SM의 글로벌 시장 인프라와 해외진출 노하우를 이용해 글로벌 진출에 시너지 효과를 보고 SM은 드라마, 영화, 공연, 예능 등 각 분야의 대표 스타들을 영입함으로서 ‘뮤직네이션’을 넘어 ‘엔터네이션’으로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김영민 대표는 AM엔터테인먼트 합병 당시 “영상 콘텐츠 제작 사업과 연기 매니지먼트 사업을 범아시아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공표하기도 했다. 이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서 배우부터 영상 제작까지 자급자족한 콘텐츠로 해외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러한 SMC&C의 공격적인 움직임에 연예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이미 영향력 있는 아이돌을 대거 보유한 SM이 SMC&C의 활약으로 더욱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 때문이다. 영상 제작 산업에 스타들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우려다.

한편 SMC&C는 2013년 6월 소속 연예인을 캐릭터로 한 모바일 게임을 론칭, 사업의 다각화를 가속화 시키고 있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때

SM은 최근 드라마 제작에도 뛰어들며 문화 콘텐츠 분야의 사업 다각화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도중 M&A를 통한 몸집 불리기로 콘텐츠를 확보하며 사업기반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계열사 SMC&C의 막강한 스타군단 영입으로 SM이 목표로 하는 영상 분야로의 진출은 순조로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력사업인 가요 분야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아이돌 트렌드가 끝나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SM은 그들이 구축해온 SM 특유의 색깔을 버리지 못한 채 비슷비슷한 콘텐츠만을 내어 놓고 있는 것.

지난해 야심차게 준비한 전형적인 SM 아이돌 엑소-K의 기대 이하의 부진과 순위와 상관없는 소녀시대의 혹평, 그리고 소속 아이돌이 참여한 드라마의 흥행 실패는 SM의 저주라는 말을 낳을 정도다. 이러한 현상들이 아이돌 왕국 SM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SM은 아이돌 시대를 열고 그 중심에서 메가트렌드를 이끌어온 영향력 있는 엔터테인먼트사다. SM 특유의 스타일이 SM을 여기까지 끌고 온 원동력이자 한류의 큰 흐름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SM의 약점이 되어 스스로를 옥죄어갈지도 모른다.

SM이라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지금의 SM에겐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의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해 K-pop신화를 꿈꾸는 진정한 문화 그룹으로써 공고히 설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사진출처: SM엔터테인먼트, SM C&C, 로엔, 씨제스스토어, 네이버프로필, KBS, SBS, bnt뉴스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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